익숙지 않은 평화로운 아침, 해는 이미 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떠있었고, 창문 새로 비추는 햇빛이 아이셀의 눈을 찔러댔다. 서서히 강해지는 햇살에 번듯한 미간이 잔뜩 구겨진다. 얄미울 정도로 빛을 쏘아대는 태양의 부추김에 바르작대며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억지로 벌려진 애꿎은 눈만 뻑뻑해졌을 뿐, 졸음은 끈질기게 아이셀의 눈꺼풀에 눌러붙어있었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푹신한 베개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 어찌하랴.
그래, 이대로 한두 시간 더 누워있자.
몽롱한 정신으로 머리를 굴려 더 뒹굴자는 결정을 내렸다. 햇볕에 데워진 나무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며 오리 털로 가득 채운 빵빵한 베개를 베고, 이불 밑에 깔려있으면 어느 누가 이 유혹을 떨치고 벌떡 있어날 수 있을까.
아이셀은 작게 한숨 섞인 신음을 뱉곤 몸을 돌려 베개에 볼을 비볐다. 푹신한 감촉이 피부에 부딪혀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어 볼이 눌릴 정도로 고개를 파묻었다. 보는 사람마저 늘어지게 만드는 긴 하품을 하며 평소보다 더운 방 온도에 이불을 반쯤 걷어내려 했을 때,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눈가를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뻗어 꾹꾹 눌러보니 말랑하고 부드러운……. 사람의 살결이었다.
이 침대 혼자 쓰는……. 아.
그제야 아이셀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아직까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피부의 주인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려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떠지지 않던 눈이 살결의 주인을 알아채곤 번쩍 뜨였으니, 삐걱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셀의 잠을 깨운 햇살이 이때다 싶어 푸른 눈을 강한 빛으로 괴롭혔다. 눈을 여러 번 깜빡여 자신을 괴롭히던 빛에 익숙해질 즘, 흐릿한 붉음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프란샤.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천과 신나게 춤을 췄는지 평소보다 더 부풀어있었고,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가있던 눈매는 여느 동물들이 잠을 청할 때처럼 순하게 닫혀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결코 순한 인상은 아니었다. 조심성 없이 다가간다면 나른한 고양잇과의 동물들이 그러하듯 저 두 눈이 떠지는 순간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이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아이셀의 붉은 늑대는 그의 토끼 앞에선 한없이 온순해진다.
웃기지 않은가. 토끼에게 품을 내어주는 늑대라니. 토끼 앞에서 한없이 순해지는 늑대라니! 프란시아의 부관이 들으면 기가 막혀할 이야기였다. 누가 순하다고? 프란시아 신틸라는 분명, 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불의 마법사인데, 그의 주변에 가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눈을 마주치면 그의 시선이 닿는 부분이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런 사람이 뭐, 순해? 프란시아의 부관에겐 프란시아와 순하다는 두 단어가 절대 동시에 거론될 수 없는 단어였다.
아이셀은 자신 앞에서 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프란시아를 보고 있노라면 검게 칠해졌던 무언가가 깨끗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달에 가있던 기다림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편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아이셀은 키득거리며 자고 있는 프란시아의 이름을 작게 부르며 볼을 쿡쿡 찔러보았다.
“프란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거기에 다른 때는 만졌다간 다른 기류로 흐르게 되는 볼을 제멋대로 괴롭힐 수 있어 뿌듯함과 만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말랑말랑해. 프란시아는 매번 밤을 새우고 늦게까지 연구와 공부를 하는데 그의 피부는 그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여린 꽃잎의 표면처럼 부드럽고 만지기 좋았다.
평소라면 볼을 찌르는 손가락을 낚아채 명백히 의도를 담은 눈빛으로 씹었을 테지만, 필히 자신보다 늦게 잤을 프란시아는 미동도 없이 쿨쿨 잘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프란시아의 체온은 평소보다 더 따듯했다.
전날 밤, 입욕제를 넣은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다 프란시아의 얼굴에 한가득 물을 뿌리는 바람에 손과 목을 잡혀 어깨를 실컷 물렸다. 물린 부분이 아프진 않았지만 낙조를 닮은 눈이 이채를 품고 번뜩이던 순간이 계속 떠올라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후엔 프란시아가 옅게 웃으며 흐릿한 잇자국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목욕이 끝나곤…….
지난 기억을 떠올리자, 몸의 열기가 온통 볼로 모였다. 목이 바싹 말라 왔다.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침을 삼켰다. 꿀꺽이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혹여 이 소리에 프란시아가 깨지 않을까, 불안할 만큼. 프란시아의 볼을 찔러보던 손을 내리고 열이 오른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그를 눈에 담았다.
햇빛이 프란시아의 긴 속눈썹을 비춰 은은하게 반짝였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시선을 조금 내려 보송하게 말라있는 붉은 입술에 집중했다. 아이셀은 그의 입술이 좋았다. 처음엔 부드럽고 후엔 축축한. 얼굴은 여전히 벌갰지만 아이셀은 자신의 뜨끈한 볼에서 손을 떼고 엄지로 프란시아의 입술을 만졌다.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유려한 턱 선을 따라 귀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로 내려갔다.
엄지가 쇄골 아래로 흐르듯 지나가자, 자연스레 시선도 엄지를 따라 이동했고 흐트러져있는 가운 속이 보였다. 아이셀의 엄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부분에서 멈췄다. 프란시아가 숨을 마시고 내뱉는 동작이 엄지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와 닿은 작은 면적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급하게 손을 때고, 열이 올라 펑 터지기 직전인 얼굴을 감추기 위해 프란시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얼굴만 가리면 다 숨은 줄 아는 동물들처럼 얼굴만 완벽하게 가렸다. 그러나 새빨간 귓가와 목덜미는 그런 아이셀을 놀리듯 쨍하게 비추는 햇빛 덕분에 훤히 드러났다.
프란시아의 품에 얼굴을 묻자, 그의 체향보다 자신에게도 나는 입욕제의 향이 더 진하게 났다. 그 사실에 아이셀은 언제 부끄러웠냐는 듯, 맑게 웃으며 프란시아의 허리를 양손으로 감싸 다시 잠을 청했다. 가운 너머로 전해지는 프란시아의 열기가 아이셀의 얼굴에 몰려있던 열을 몸 곳곳에 고루 돌게 했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천천히 놓는 순간에 머리에 따끈한 온기가 전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 책을 고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절대, 절대로 일부러 고른 책이 아니었다. 붉은 벨벳 융단으로 마감이 된 꽤 두꺼운 책이 날름거리는 뱀의 혀처럼 자신을 유혹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 혀는, 끙……. 아무튼 아이셀은 벌게진 얼굴로 질척이고 아픈 소리로 범벅이 된 문란한 책을 두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아무리 세게 쥐어봤자 그 책은 구겨지긴커녕 벨벳의 감촉이 손가락을 꾀듯 자글거린다. 혀가 어쩌고 손가락이 어쩌고 말랑한 입술이……. 책의 내용을 상기하자 망측한 문장들이 아이셀의 정신을 괴롭혔다. 고개를 강하게 휘휘 저으며 책의 내용을 털어내려 애썼지만 자극적인 것들이 으레 그렇듯 더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절대, 절대, 절대 알고서 고른 책이 아니었다. 마을로 뮤리엘의 심부름을 하다 오면서 들른 서점에서 제목도 저자도 쓰이지 않은 책이 궁금해서 펼쳐보지도 않고 사 온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책을 살 때 주인의 표정이 묘하긴 했었지…?”
웃음을 참으려 하는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안쓰럽게 자신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이 책이 뭐길래 그런 표정이었지? 아니 그보다 이런 책인 줄 알았으면 말렸어야 한 것 아닌가. 아이셀은 애꿎은 바닥을 탕탕 치며 화풀이를 했다.
콰직.
“아.”
큰일 났다. 짙은 고동색의 나무 바닥에 아이셀의 주먹보다 큰 구멍이 뚫렸다. 이걸로 36번째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아이셀이 힘을 조절하기 못해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었을 때 뮤리엘은 아이셀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셀아, 힘이 남아도는구나. 나 같으면 그 힘을 다른데 써볼 텐데. 예를 들면, 바위 밑에 숨겨진 정령석 찾기라던가?”
분명 그의 마녀님은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셀은 뮤리엘이 마법으로 뚫린 구멍을 되돌려 놓는 동안 정말로 숲속을 뛰어다니며 바위 밑에 정령들이 숨겨둔 정령석을 찾으러 하루 종일을 뛰어다녀야 했다. 물론 그리 쉬이 찾아질 정령석이 아니었다. 또 정령석이 바위 밑에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자연의 기운, 정령의 기운이 수십수백 년 모이고 쌓이며 응축된 정령석은 매우 귀한 돌이기에, 영리한 정령들이 그들만의 공간에 숨겨뒀을 것이다. 뮤리엘은 아이셀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그가 바닥에 구멍을 뚫을 때마다 미소 지으며 지그시 바라봤다. 그 미소를 본 아이셀은 군말 없이 숲으로 향했다. 아이셀이 그 진실을 깨달은 때는 한참 먼 미래겠지.
아이셀은 오래 당황하지 않고 바닥의 푸른 카펫을 끌어당겼다. 오른쪽 창가에 있던 카펫이 왼쪽으로 치우쳤지만, 아이셀 본인은 완전 범죄라고 만족하며 붉은 책을 품에 안고 방문을 나섰다. 이 책을 다시 팔든 버리든 처리하기 위해. 카펫을 치운 자리에 저번에 뚫어둔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는 것은 밖으로 나갔다 온 후에 알았다. 무시무시한 뮤리엘의 미소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도망치듯 떠나는 아이셀의 뒷모습을 보며 뮤리엘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에일로즈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에일로즈는 이미 닫힌 문에 잘 다녀오라며 인사를 보냈다. 영락없는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아직 안 들켰겠지? 오늘은 정말 정말 실수였단 말이야.”
마을 광장에 다다른 아이셀은 정말 억울한 얼굴로 귀를 한껏 내리며 터덜터덜 걸어가니 비를 쫄딱 맞은 토끼처럼 보였다. 억울할 만도 하지. 책에 홀려-본인은 분명 홀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닥에 또 구멍을 뚫고 말았으니.
아아, 불쌍한 아이셀. 나를 읽으며 누굴 떠올렸기에 이리 과민 반응일까?
머릿속을 울리는 기묘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곧게 뻗어있는 토끼 귀를 통해서도, 오밀조밀 잘 조형된 귀를 통해서 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청각기관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전해지는 목소리를 듣자 감각이 곧추세워졌다. 낯선 목소리가 했던 말을 상기시키자 고개가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책은 바람에 휘날리듯 책장을 흩날리고 있었다. 시장을 가득 채운 천막들은 고요했는데 말이다.
팔랑팔랑, 자신을 쥐고 있는 누군가를 놀리듯 움직이는 행동이 얄미웠지만 책이 말한 누군가가 다시 떠올라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행인들이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붉은 책을 빤히 응시하는 아이셀을 한 번씩 흘기고 갔지만 아이셀을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까지도.
갑자기 전해지는 온기에 화들짝 놀란 아이셀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렸다. 아야. 내동댕이쳐진 책은 아팠는지 작게 소리를 질렀다. 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나? 같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오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 지고한 해가 마음껏 제 위용을 뽐낼 수 있었다. 그런 태양 밑에선 오직 붉음을 제외하곤 다른 색들은 빛을 바랜다. 자신보다 조금 큰 키의 얼굴을 보느라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음에도 눈이 부셨다. 눈앞이 발갛게 물들었다. 빛을 내리받는 머리카락은 강렬하게 타올라 제눈에 담겼다. 아이셀은 멍하니 그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 어깨에 전해지는 가벼운 자극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셀아. 아이셀!”
그는 계속해서 아이셀의 이름을 불렀는지 결국엔 애칭이 아닌 세 글자를 입에 담았다. 본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묘하게 비껴나갔던 시선이 그제야 제 눈을 바라봤다. 침범하면 깨질 듯 맑은 눈에 총기가 돌며 언제나 늘 그랬듯 반으로 접혀 웃어야 했다. 그러나 저를 보면 반사적으로 반달 모양으로 접히던 눈매도, 호선을 그리던 입매도 오늘만큼은 번듯한 모양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이셀은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그의 귀걸이로 옮겼다. 또 눈을 피했다.
“프란샤, 안녕! 날씨가 참 좋다. 아직 수업시간 아니야? 밥은 먹었어? 이런 날은 네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컵케이크를 먹고 싶어!”
“응, 안녕. 셀아. 날씨는, 그러게 정말 좋아.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잠깐 부족한 재료를 사러 나왔고, 밥은 아직 안 먹었어.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카페 가서 배 채우자.”
횡설수설 질문과 주장을 늘어놓는 아이셀의 말에 프란시아는 차분하게 대답을 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밀어 빗나간 시선을 돌려놓았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고, 아이셀의 시선이 입술로 내려간 것을 알아챘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강렬한 두 눈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에 뭐가 묻었나. 손을 들어 입가를 쓸자, 아이셀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흐음, 셀아 어디 불편해?”
“아니! 전혀! 하나도 안 불편한데?”
빠른 호흡으로 말을 뱉는 아이셀은 누가 봐도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본인이 수긍하지 않으니 프란시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이셀이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책이 신경 쓰였다. 아이셀은 책을 떨군 사실을 잠시 잊었는지 주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프란시아가 대신 책을 주워들고 툭툭 가볍게 먼지를 털어냈다. 아이셀에겐 다행이게도 책은 표지가 꾹 닫힌 채 떨어졌다.
“이 책은 뭐야? 제목이 안 적혀있네?”
“힉, 기, 길가에서 주웠어! 주워줘서 고마워. 아… 아! 프란샤, 재료는 다 샀어? 손이 비었는데, 바로 카페가도 되는 거야?”
프란시아가 책을 펼치려 하자 아이셀이 기겁을 하며 책을 가져갔다. 말을 돌린 건가? 사실대로 말하긴 곤란했는지 어설픈 말솜씨로 말을 돌렸다. 자신도 티 나게 말을 돌린 것을 아는지 멋쩍은 얼굴로 양 팔로 책을 끌어안고 신발 앞 코로 바닥을 두드렸다. 때를 봐서 확인해봐야지. 프란시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재료는 오는 길에 사도 돼. 많이 살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것 보다 셀이, 너랑 디저트가 더 먹고 싶어.”
사실 재료는 부족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부족한 재료들은 그의 말 하나면 반 시간도 안 되어 손안에 들어왔으니까. 아카데미는 공정했고, 편파적이었다.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가 입학할 수 있었고, 성적에 따라 혜택이 달라졌으니. 늘 아카데미 수석을 차지하는 프란시아의 말에 학장과 교수들이 끔뻑 죽어나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봤자 아카데미를 빛내줄 도구로 생각하는 것을 모를 줄 알고. 프란시아는 속으로 비소를 머금은 채 그런 그들의 생각을 언짢아했다.
이따금 내비치는 고리타분한 귀족주의 교수들과 자신의 발끝만큼도 노력하지 않는 학부생들의 시기 어린 시선이 거치적거려 잠깐의 휴식이 절실했다. 그 공간에 더 있으면 속마음이 흘러나올게 분명해서, 이번 재료는 꼭 자신의 눈으로 고르고 확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외출증을 끊어 광장으로 나왔다. 대충 좋아 보이는 재료를 사 가면 된단 생각을 하며 광장을 돌아다니는 프란시아의 눈에 아이셀의 노란 머리칼이 걸렸을 때, 불쾌한 감정들은 삽시간에 씻겨나갔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붉은 책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흘러나와 관심이 갔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아이셀의 상태가 더 신경 쓰였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카페에 가 차차 알아보면 될 터였다.
붉은 얼굴을 한 채,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이 꽤, 아니 아주 속상했다. 그런 주제에 손을 내미니 책을 끌어안고 있던 한쪽 손을 풀어, 내민 손을 꿈질대며 맞잡는 행동은 더없이 귀여웠고. 5년 전만 해도 프란시아가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은 없었다. 아이셀이 알려준 일들 중엔 먼저 손을 내미는 행위가 의외로 충분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있었다. 프란시아에 비해 낮은 온기가 손을 통해 전해오자 가슴이 간지러웠다. 실타래처럼 엉켰던 마력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감각을 즐기며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오는 동안 책은 조용했다. 아까 말을 걸었던 것이 아이셀, 본인의 착각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럼에도 아이셀의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었고, 자꾸 프란시아의 입술로 향하던 제 눈이 야속했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프란시아의 한 마디, 손짓 하나에 그 행동은 의미 없는 행위가 되었다. 카페로 걸어오는 동안 잡생각을 떨쳐내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얘기들을……. 그럼에도 프란시아는 대답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손끝이 간지러워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총 3층으로 된 카페는 간단하게 빵을 주문하고 갈 수 있는 1층, 마법으로 온실 정원을 구현해둔 2층,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구성된 3층으로 나뉘어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하얀색으로 꾸며진 공간 곳곳에 초록색의 생기를 뿜어내는 작은 식물들과 벽을 향기롭게 장식하는 꽃들이 프란시아와 아이셀을 반겼다. 카페의 창은 꽤 컸기에 바깥에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1층에서 다과를 즐기는 사람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밖으로 넘실거리는 고소하고 달콤한 빵과 디저트의 향기가 이 가게의 성공 비결이었다. 프란시아와 아이셀도 냄새를 맡고 홀린 듯 입구에 들어선 후엔 이 가게의 단골이 됐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의 점원이 안내를 도왔고, 2층으로 안내를 부탁하는 프란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마동력기 앞에 섰다. 투명한 박스 형태의 마동력기는 프란시아와 아이셀이 타는 것을 확인한 점원이 ‘2’라고 적힌 버튼을 누르자 수직으로 상승했다. 투명한 탓에 밖이 훤히 보였는데 온통 하얗던 1층의 풍경은 어느새 사라지고 푸릇한 식물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막힘없이 빠르게 올라가던 마동력기의 속도가 차츰 느려지다 멈췄다.
2층입니다. 점원의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앞쪽의 투명한 벽이 스르륵 녹아내려 내릴 수 있게 했다. 어딘가의 유리온실을 그대로 투영한 듯, 3층이 있어야 할 천장이 푸른 하늘이 훤히 보이는 유리천장으로 바뀌어있었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스킨답서스가 자라고 있는 짙은 색의 원목 파티션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돌아다니는 점원 이외에 파티션 안쪽을 지켜볼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프란시아와 아이셀은 만개한 장미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자리로 안내받았다. 의자는 사이좋게 나란히 놓여있었다. 테이블 정면으로 유리벽에 큰 창이 뚫려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미온은 머금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아이셀은 의자를 보자마자 잡은 손을 떼고 의자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프란시아는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가 아쉬웠다. 디저트가 그리 좋았나. 디저트에게 생기려는 어이없는 질투심이 고개를 들 때.
“앉아, 프란샤!”
뿌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의자를 꺼내둔 아이셀을 보자 불씨를 감췄던 온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자신에게 의자를 꺼내주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의자를 잡고 있는 아이셀의 손을 스치듯 잡으며 감사를 전하는 눈웃음을 보냈다. 프란시아가 의자에 앉자 아이셀이 뒤에서 테이블과 적당한 거리로 밀어주었다. 언제 봐도 넘치는 힘이었다. 아이셀도 자리에 앉자, 어느새 주문을 받는 파랑새가 날아왔다. 파랑새는 목에 손바닥 크기의 종이카드와 짧은 연필을 매고 있었다.
프란시아는 좀 전의 광장에서 컵케이크를 먹고 싶다던 아이셀의 말을 떠올리며 당근 컵케이크와 에프터눈 티 트레이를 카드에 적었다. 마실 건… 늘 마시던 홍차로. 간단하게 주문을 적고 파랑새의 목에 카드를 걸어주자 파랑새는 포르르 울며 날아갔다.
프란시아는 새가 날아간 것을 확인한 뒤, 테이블에 손을 올려 턱을 괴고 아이셀을 물끄러미 보았다. 책을 무릎에 올려둔 아이셀은 그 위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 마디에 있는 주름들을 당기며 괴롭혔다. 누가 봐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프란시아는 그런 작은 반항이 귀여워 슬쩍 웃었다. 작게 웃었다 생각했는데, 아이셀에게 들렸는지 쫑긋한 귀가 자신의 방향으로 살짝 틀어졌다. 아 빨개진다. 좀 전까지만 해도 씩씩하게 제 의자를 꺼내주었으면서 이제 와 낯가리는 토끼마냥 귀엽게 군다.
“셀아, 나 안 볼 거야? 내가 잘못한 거 있어?”
서운함이 잔뜩 묻어난 프란시아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혀 마주할 생각을 않던 시선을 맞췄다. 부러 눈썹을 내리고 쓸쓸한 미소를 짓자, 안절부절못하는 손이 굽혔다, 펴진다.
“그럴 리가! 그냥, 그냥 나한테 문제가 조금 생겨서……. 프란샤는 잘못한 거 없어. 으, 내가 프란샤 너를 볼 때마다…!”
다급하게 말을 전하다, 눈을 질끈 감고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부끄러워 죽겠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던지 아이셀의 심장소리로 이 온실을 가득 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말하고 싶어. 이 답답함을 풀고 싶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닿고 싶어.
“프란샤, 너를 볼 때마다 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아이셀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점원과 디저트를 가득 실은 트레이의 등장으로 흐름이 끊겼다. 아이셀은 꼬리를 만 동물처럼 기가 한 풀 더 꺾였다. 그 때문에 프란시아는 조금 짜증이 났다. 지독한 한기를 담은 눈이 점원에게 향했고,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점원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한 번의 깜빡임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온 프란시아에게선,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었다.
점원은 빠르게 트레이 위의 메뉴들을 내려놓은 뒤, 즐거운 시간을 보내란 말과 함께 사라졌다. 점원이 나간 후에도 아이셀은 굳어있었다. 키, 다음에 무슨 말을 내뱉으려 했던 거지? 프란시아에게 키…스를 하고 싶다고 말할 생각이었나? 프란시아와 아이셀 간의 입맞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종종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셀이 원한 것을 짧고 가벼운 키스가 아니었다. 제 무릎에 올려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농밀하고 진한, 시선이 얽히고 호흡이 섞이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쓰여 있는 것을 해봐. 혀를 …고 가볍게 …어봐. 저 애도 좋아할걸. 후후.
또 다. 또 책이 말을 걸어왔다. 책이 건넨 말의 내용은 어지러울 만큼 달콤했다. 책의 말대로 한다면 이 갈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의 아이셀이 들었다면 저속한 말을 하는 책을 북북 찢어 장작과 함께 태웠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본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자신과의 싸움에 갇혀있는 아이셀의 입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입에 닿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크림치즈 위에 잘게 빻은 견과류를 올려 마무리 한 당근 컵케이크였다. 고소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셀아, 나는 여기 있는데 자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 말고 생각할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
프란시아는 한 입 베어 물린 컵케이크를 장난스레 흔들며 웃었다. 그리곤 입을 우물거리는 아이셀을 보더니 작게 탄식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셀은 입가에 크림치즈가 묻은 게 느껴져 혀를 내밀어 핥자, 프란시아가 뻗은 손가락과 부딪혔다. 대부분의 크림치즈는 깜짝 놀란 아이셀의 입으로 사라졌지만 프란시아의 손가락에도 조금 남아있었다.
순간이었지만 닿았던 감촉이 아이셀을 심적으로 다급하게 만들었다. 프란시아가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핥아보며 당근 컵케이크가 생각보다 꽤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을 때, 아이셀의 무릎에서 붉은 책이 떨어졌다. 활짝 펴진 채로.
그그극,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열린 창문 너머로 부서지는 잔디 소리가 공간을 메꿨다. 아이셀은 다급하지만 조심스럽게 프란시아가 핥은 손가락은 제 입으로 가져갔다. 프란시아가 핥고 아직 닦지 못한 그 손가락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신의 손가락을 길게 핥는 아이셀을 보던 프란시아는 답지 않게 당황을 했다. 붉은 살덩어리는 축축했고, 뜨거웠으며 묘한 감각을 자아냈다. 프란시아는 잇새로 나오려는 무언가를 참기 위해 입술을 꽉 물었다. 옅은 하늘의 색을 담은 눈동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손가락을 실컷 맛본 후 그 위에 허락을 구하듯 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입술을 떼지 않고 낮게 말했다.
“프란샤, 내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그러니까, 너를 볼 때마다 키스를 하고 싶어져.”
“…….”
“그, 당근 컵케이크가 꽤 괜찮다고 했었잖아…….”
“…….”
“또 먹어볼래?”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간간이 축여봤지만 갈증만 더 심해졌다. 저 입이 떨어져 어서 허락의 말을 뱉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프란시아는 가만히 아이셀을 말을 듣고만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요구란 것을 알았는지 볼 부근이 발갛게 물들었다.
응? 프란샤. 아이셀은 재촉하듯 붉은 볼을 어루만졌다. 봐, 네 볼도 이미 붉잖아. 기대하고 있는 거지? 어서 허락해 줘. 저리 노골적인 의미를 담은 눈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프란시아는 대답 대신 마주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허락의 뜻을 전했다.
인내를 갖고 프란시아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이셀은 그 눈짓에 허리를 숙였다. 아이셀은 프란시아의 입꼬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노크를 하듯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그리곤 프란시아의 입술을 슬쩍 핥았다. 프란시아는 급하게 팔을 뻗어 아이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이셀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프란시아의 목을 받쳤다. 도망가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다분히 담은 행동이었다.
자신이 상념에 빠져있던 동안 홍차를 마셨는지 홍차 향이 났다. 홍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프란시아였건만, 그의 입술에서 맛보는 홍차의 맛은 아주 달았다. 보송했던 프란시아의 입술은 제 것이 아닌 타액에 젖어 보기 민망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프란시아는 생경한 자극에 아이셀의 옷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척추에 힘이 들어갔고, 자꾸만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행히 아이셀이 목을 받쳐주어 불상사는 피했지만, 계속 힘을 주고 있어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근육들이 긴장했다. 뻣뻣하게 굳은 프란시아의 상태를 눈치챈 아이셀이 놀고 있는 다른 한 손으로 프란시아의 팔을 쓸었다. 근육들의 긴장을 풀어주듯 주무르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프란시아의 몸이 한층 풀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셀이 프란시아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읍.”
갑작스런 자극에 프란시아가 신음을 흘렸지만 곧 아이셀에게 먹혀 사라졌다. 아이셀은 강하게 깨문 것이 미안했는지 이빨이 아닌 입술로 물고 빨아들였다. 물밀려오는 자극들이 프란시아의 이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런 자극적인 행위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도 구석진 곳에서 입술을 이어붙인 듯이 비비고 있던 학생들이 있었으니. 프란시아는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남의 타액을 삼키는 행위가 무엇이 좋은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행위는 부끄러움을 꾹 참을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오늘을 이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면 아쉬울 것이 분명했다. 사탕을 처음 먹는 아이처럼 자신의 아랫입술을 쪽쪽 빠는 아이셀에게선 단 맛이 났다. 프란시아는 조금 더 그 단 맛을 맛보고 싶었다.
만족스러울 만큼 아랫입술을 괴롭힌 아이셀은 도톰한 살에게 자유를 내어줬다. 그리곤 포상의 의미로 짧게 입을 맞췄다. 아이셀이 잠시 떨어진 순간에 프란시아는 숨을 크게 마시고 내뱉었다. 다시 돌진해오는 축축한 입술에 또 한 번 숨을 삼켜야 했지만.
맞닿은 입술을 꾹 눌러 비볐다. 혀를 내밀어 입술의 틈을 가르듯 핥았다. 그 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꾹 닫힌 두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란시아는 아이셀이 안달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꽤 익숙해 보이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런 질척한 행위는 처음일게 분명한데, 아이셀만 자신의 혼을 쏙 빼놓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입을 다물고 있다 열어줄 생각이었던 프란시아는 볼이 꾹 눌려 입술이 벌어졌다.
불쑥 침범한 뜨거움에 몸을 들썩였다.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빠졌지만 목을 잡고 있는 손이 단단하게 버텼다. 으. 힘겹게 신음을 뱉어보지만 남의 영역을 함부로 헤집고 다니는 침입자의 무례한 행위에 뭉그러졌다. 아이셀의 말캉하고 뜨거운 살점은 서툴게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고른 치아를 훑어보기도 했고, 여린 입천장을 꾹 눌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고 프란시아의 혀로 목표를 바꿨다.
거침없이 얽히려 드는 아이셀의 혀를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그는 끝까지 쫓아와 혀를 감았다. 넘어오는 타액을 겨우 삼키던 프란시아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헐떡였다. 아이셀은 이 미끈한 감각에 집중했다. 진득하게 문지르고, 누르고, 쓸었다. 새로운 감각을 익히는 것이 흥미로웠다. 프란시아의 입안은 그의 체온보다 뜨거워서 혀가 눅진하게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품에서 녹아내린다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 숨이 막히는지 아이셀의 어깨를 빠르게 치는 프란시아의 손길에 입을 뗐다. 투명하고 가는 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이셀은 자신의 양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거칠게 호흡하는 프란시아를 빤히 보았다. 다음엔 조금 짧게 해야겠네. 태연하게 다음을 생각하며, 입술에 남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타액을 붉은 혀로 핥아냈다. 호흡을 가다듬은 프란시아가 겨우 고개를 들고 아이셀을 보았다. 분명 숨이 막힐 정도로 입을 맞췄는데 힘든 기색은커녕 평소와 다름없이 호흡하는 아이셀이 경악스러웠다. 프란시아는 피부로 호흡하는 포션을 구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먹어보니 어때 정말 맛있었어? 나는… 홍차가 좋아졌어. 각설탕을 듬뿍 넣지 않아도, 달았어.”
아이셀은 배시시 웃으며 잡힌 손을 흔들었다. 진짜 달았어. 민망한 소리를 내며 남의 입술을 머금은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해맑고 수줍게 말했다. 프란시아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아랫입술이 얼얼한데, 아이셀은 처음 볼에 입을 맞춘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프란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둔 컵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당근 컵케이크에는 아직 크림치즈가 남아있었다. 아직 서있는 아이셀을 의자에 앉히고, 손으로 턱 끝을 잡고 들어 올렸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눈에 걸렸다. 그 덕에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것이 묻어있는 입술을 마주했다.
크림치즈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부분을 아이셀의 입술에 가득 묻혔다. 초콜릿색 피부에 하얀 입술은 제법 맛있어 보였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프란시아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아이셀의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의아하게 프란시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이셀은 입에 묻은 크림치즈를 날름 핥았다.
“핥으면 안 되지. 이건 내 거야.”
“어?”
“한 번으론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언제나 명료한 답을 추구해. 네게 정확한 답을 알려주기 위해선 또 먹어봐야 알겠어.”
프란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진중하게 아이셀이 핥아 버린 빈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아이셀이 앉아있는 의자를 당겼다. 아이셀처럼 한 번에 끌어오진 못했지만, 천천히 다가오며 변하는 아이셀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기에 괜찮았다.
무릎이 닿았고, 코끝이 닿았다. 입술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멈추자, 아이셀이 입술을 벌렸다. 프란시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바로 해주긴 싫어, 그가 했듯이 입술을 핥았다. 슈가파우더를 넉넉하게 넣었는지 크림치즈는 제 입에도 달았다.
프란시아는 윗입술에 묻은 것을 먼저 먹어치웠다. 그다음 순서로 아랫입술에 혀를 대자 입술 사이로 뜨거운 것이 마중 나왔다. 성급한 그 행동이 발칙해, 벌로 혀를 콱 물어버렸다.
윽. 눈을 꼭 감고 있던 아이셀은 상상치도 못한 자극에 눈을 번쩍 떴다. 혀를 물려 내밀어진 상태로 울상을 지었다. 프란시아는 시선을 눈치채고 물고 있던 혀를 놔줬다. 그리고 아랫입술과 함께 빨아들였다. 타액, 혀, 크림치즈가 한데 섞여들었다. 자신의 침조차 삼키기 힘들던 아까완 달리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액체들을 꿀떡꿀떡 삼켰다. 과연 배움에 능한 아카데미의 수석다웠다.
아이셀의 점막을 쓸고, 빨아들이는 놀림은 아이셀보다 자연스러웠다. 프란시아는 슬쩍 눈을 떠 아이셀의 얼굴을 살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제법 보기 좋았다.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나른한 만족감이 자리를 잡았다. 흐트러진 얼굴과 다급한 혀의 움직임이 등줄기를 흐르는 짜릿함의 원천이었다. 발이 곱아들고 뱃속이 뜨거워졌다. 이대로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멈춰야 했다.
입술을 떨어트리자, 아이셀이 쫓아왔다. 프란시아는 단호하게 턱을 붙잡으며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이대로 모른 척 다시 입안을 내어주고 싶었지만 이대로 더 입을 맞물리고 있으면 정말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 번째 키스보다 호흡을 조절하여 가쁜 숨을 내쉬진 않았다. 아이셀은 흐릿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지만, 여전히 호흡은 일정했다. 프란시아가 열렬히 빨아재낀 아이셀의 입술은 조금 부어올랐다. 그것이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소매로 젖은 입술을 닦아주었다. 물론 프란시아의 입술도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제 입술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었다.
두 사람이 붙어있는 동안 찻물을 식었고, 목구멍으로 단 것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단 것을 실컷 빨아먹었기에. 프란시아는 아직도 멍하게 있는 아이셀의 볼을 툭툭 쳐 깨웠다.
“먹은 거라곤 당근 컵케이크 위에 크림치즈뿐이었지만, 달았어, 나도. 이제 만족해?”
“……. 다음에 또 먹자.”
발간 얼굴로 다음을 기약했다. 욕망이 민망함을 이긴 것이다. 프란시아가 푸스스 웃자, 아이셀도 마주 웃었다. 갈까? 응. 프란시아가 손을 내밀었고, 아이셀이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발에 차이는 무언가를 봤다. 어느새 새하얀 아가리를 닫고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던 이름 없는 책이었다. 아이셀은 더 이상 이 책이 제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그렇기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주워들었다. 여전히 프란시아는 책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내용을 말해주기 부끄러웠다. 키스 이후의 것을 행할 용기도 아직 없었고.
카페를 나서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보다 더한 배부른 만족감은 없을 것이다. 뭉근한 살덩이의 감촉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아이셀은 아쉬움을 떨치려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꾹꾹 눌러댔다. 그리곤 한 걸음 앞서가던 프란시아의 손을 뒤로 당겨 손등에 뽀뽀를 퍼부었다. 프란시아는 의아한 기색 없이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간지러워, 셀아.”
“으응.”
간지럽다 말하는 프란시아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래서 아이셀은 만족할 때까지 손등과 손바닥에 마음껏 입을 맞췄다. 아이셀은 광장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도, 여전히 프란시아의 손에 입술을 묻고 있었다.
광장에 도착한 프란시아와 아이셀은 한참을 서있었다. 두 사람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헤어지기 싫었던 것이다. 프란시아는 약속했던 재료를, 아이셀은 책을 돌려주러 서점에 가야 했기에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가기 싫어. 프란샤, 안 가고 나랑 있으면 안 돼? 너랑 더 같이 있고 싶어.”
“나도. 셀이, 너랑 더 같이 있고 싶어. 네가 정말 작은 토끼였다면 내 주머니에 넣어서 데려가는 건데.”
아이셀이 프란시아의 손을 조르듯 흔들었다. 흔들리는 제 손을 보면서 프란시아는 본심을 말했다. 제 주머니를 슬쩍 가늠하면서.
“하아, 그런데 외출증만 끊고 나온 거라……. 대신 주말에 만나자. 응? 주말에 수선화 꽃밭에 피크닉 가는 거야. 어때?”
“샌드위치도 싸서?”
“응. 네가 좋아하는 사과잼을 넣은 샌드위치를 가득 만들어서.”
아이셀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아는 잡힌 손을 훅 당겨 아이셀을 품으로 끌었다. 그리고 칭찬하듯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이마에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절로 웃음이 나는 접촉이었다.
“그럼 프란샤,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음, 내 생각 해!”
“알았어. 꼭 네 생각 할게. 셀이, 너도 조심히 들어가. 뛰지 말고.”
“안 뛰어! 잘 가. 프란샤!”
“…….”
“…….”
“셀아 손을 놔줘야 가지.”
“힝.”
귀를 늘어트리며, 느릿느릿 손가락을 하나하나 떨어트린다. 끝끝내 모든 손가락이 떨어지자, 프란시아가 아이셀의 등을 도닥이며 먼저 가라 재촉했다. 단호하게 하지 않으면 아이셀이 하루 종일 광장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아라고 헤어지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셀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위험했기에, 조금은 냉정해져야 했다. 방금도 잘 가란 말관 반대로 손을 꾹 잡고 놓아주지 않는 앙큼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프란시아는 간절하게 축소 마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아이셀은 세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몇 번을 돌아보든 프란시아는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를 계속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프란시아에게 양손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프란시아는 그 자리를 떠났다.
어렵게 프란시아와 헤어지고, 오늘의 최고 공헌자인 붉은 책을 처리하러 서점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달린 종이 맑게 울렸다. 서점의 카운터엔 그때 본 주인이 앉아있었다. 올 줄 알았단 얼굴로.
“왔어요, 아가씨? 좋은 시간 보냈나요?”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음? 책의 파동이 잔잔한데… 저주를 푼 게 아닌가요?”
“저주요?”
저주라니? 위협적인 단어에 아이셀은 지레 겁을 먹었다. 들고 있던 책을 냉큼 카운터에 올려놨다.
“그 책은 읽는 사람에게 저주를 거는 책이에요. 책에 나온 행위 한 가지를 해야만 하는 저주. 책이 부추기지 않았나요? 그걸 무시하고 참았으면, 욕구가 쌓이고 쌓이면 펑~ 터져버렸을지도. 펑 터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욕구를 이긴 사람은 못 봐서.”
주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단조롭게 말했다. 아가씨가 그랬듯이. 주인은 건네받은 책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개구지게 웃었다. 그리 젊은 나이대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저리 웃는 것을 보니 자신의 또래처럼 보였다. 아니 정말로 또래의 얼굴로 변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마녀였나. 한순간에 젊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아이셀이 신기했는지 턱을 괴고 빤히 바라봤다.
“그래도 저주를 푸는 방법이 쉬우니, 문제 될 건 없잖아요. 그렇죠?”
“아니요……. 문제 있어요. 그 책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세요?”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 아닌가요? 아가씨 입술 퉁퉁 부었어.”
“!”
주인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박하고 싶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재빠르게 입술을 가렸다. 주인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댔다. 주인은 아이셀이 치렀던 대금보다 적은 양의 돈을 돌려줬다. 아이셀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짤랑이는 동전을 낚아채 도망치듯 서점을 나섰다. 잘 가요. 등 뒤로 웃음기 어린 느긋한 인사가 들려왔다.
아이셀이 서점 문을 박차고 나선 지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것을 보니 아카데미의 학생인 것 같았다. 학생의 붉은 머리카락이 문이 닫히며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학생은 무심한 눈으로 서점을 둘러보다 주인이 앉아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방금 팔린 책 있죠? 붉은 벨벳으로 된 책.”
주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학생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탐색했다. 지금껏 자진해서 자신이 직접 저주를 건 책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 책을 일반 책들 사이에 끼워 넣으면, 자아를 가진 책이 직접 장난칠 사람을 고르는 식이었다. 좀 전의 귀여운 토끼 아가씨 같은 경우였다.
주인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번에 이 책을 보낸다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책을 사간 사람들은 늘 닷새 안에 책을 다시 팔러 왔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사간 값의 절반도 안 되는 값을 쳐줬다. 그런 행위는 주인에게 나름 짭짤한 벌이가 되었다.
그러나 주인은 책을 학생에게 팔기로 했다. 당장 넘기지 않는다면 이 서점을 전부 태워버릴 기세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쉽긴 해도 책이야 새로 쓰고 또 저주를 걸면 되니까.
뼛속까지 장사치였던 주인은 다른 이들에게 팔았던 가격의 세 배를 불렀다. 학생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주인이 부른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볼 일을 다 봤으니 미련 없다는 듯이 횅하니 사라졌다. 주인은 즐겁게 돈을 짤랑이며 새로운 책이 될 표지를 골랐다.
긴 꿈에서 깨어난 아이셀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에 눈을 뜨기 싫었다.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품을 파고들었다. 언제부터 깨있던 건지, 노란 머리칼을 쓸던 손길이 멈췄다. 제 품을 파고든 동그란 머리통을 잠시 바라보다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셀아, 안 일어나면 괴롭힐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 말에 아이셀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아이셀의 눈을 찔렀다.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대충 흔들었지만 머리카락은 저들끼리 더 엉킬 뿐이었다. 결국 프란시아가 아이셀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시야가 한층 자유로워지자 프란시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꿈에서 실컷 맛봤던 입술에 꽂혔다. 충동적으로 프란시아의 입에 입술을 붙였다. 짧은 입맞춤을 뿌듯하게 여기며 떨어지려 했지만 쫓아오는 입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읍, 프란, 읏.”
아이셀의 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물기 어린 소리를 만들었다. 당황한 아이셀이 그를 불렀지만 그 소리는 그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 네가 먼저 시작했어. 어느새 프란시아는 아이셀의 위에 있었다. 위에서 퍼붓는 진한 키스에 아이셀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국 아이셀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혀를 얽었다.
프란시아는 아이셀의 구석구석을 맛 본 후, 마지막으로 깊게 입술을 빨며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막 깨어나 둔한 혀를 실컷 괴롭힌 프란시아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협탁에 있는 유리잔에 물을 채웠다. 그리곤 제게로 몸을 돌려 누운 아이셀에게 물을 담은 컵을 내밀었다.
“자, 물.”
아이셀은 미적미적 몸을 굴려 프란시아가 건넨 물을 받아마셨다. 프란시아는 그가 물을 다 마시자 기다렸다는 듯 빈 컵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놨다. 옆에 딱 붙어 몸을 말고 있는 아이셀을 양 팔로 가두자, 아이셀은 침대와 프란시아 사이에 갇혔다.
“셀아.”
“…응?”
“일어나자마자 뽀뽀하는 건 무슨 의미야?”
“…….”
“눈 피하지 말고. 대답해야지. 아니면, 내 멋대로 해석해도 돼?”
“……. 꿈을 꿨어.”
꿈? 프란시아의 추궁 아닌 추궁에 아이셀은 우물쭈물 입을 땠다.
“예전에 우리 처음 키, 키스 했던 날의 꿈.”
“아. 네가 키스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그때?”
“말로 하지마…….”
아이셀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프란시아는 달게 웃으며 고개를 비튼 덕에 훤히 보이는 귀에 숨을 훅 불었다.
“!”
아이셀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숨을 불어넣은 귀가 간지러운지 연신 긁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취재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프란시아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다. 버둥거리는 아이셀의 움직임을 눈치 챈 프란시아가 그보다 빨리 작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그 붉은 책.”
아이셀은 눈에 띄게 움직임이 멎었다. 네가 그 책을 얼굴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프란시아는 그의 그런 반응을 즐겼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새 먹잇감을 찾은 프란시아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연구일지가 가득한 책상의 맨 밑 서랍을 열자 너무나 익숙한 책이 보였다. 이미 책의 저주를 풀어두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속된 소설일 뿐. 아이셀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별 문제되지 않았다.
아이셀이 팔고, 프란시아가 사들인 책이 지금 여기 다시 펼쳐졌다. 아이셀은 다급한 손길로 책을 낚아채려 했지만, 막 일어난 몸은 둔했고, 깨어있던 몸은 재빨랐다.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아이셀은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프란시아는 아이셀의 어깨를 꾹 밀고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책을 펼쳐 눈으로 대충 훑는 시늉을 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아이셀에게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다.
“네가 그랬듯, 이 책을 읽은 이상 책에 나온 것들을 해야 저주를 풀 수 있겠네. 안타까워라.”
“프, 프란샤? 그 책, 책을 어떻게……. 읏, 잠시만!”
“도와 줄 거지? 응? 셀이, 네가 내 입안을 마구 헤집었던 걸 기억해.”
“…….”
아이셀은 울고 싶었다. 이 상황이 싫은 게 아니었다. 뱃속이 뭉치는 기분에 벌써부터 몸이 떨렸기 때문에. 아이세은 울먹이는 얼굴로 이 상황에 순응했다. 기가 꺾인 아이셀의 눈빛을 확인한 프란시아는 기꺼이 자신을 바친 먹잇감을 잡아먹었다.
아주 깊은 밤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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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Rabbit (0) | 2021.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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